블레셋 Philist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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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겸 댓글 0건 조회 50회 작성일 24-09-11 17:05본문
이스라엘에 가장 위협적이었던 민족, 블레셋
나라 운명, 주변국들과 상대적 관계 속 결정
중앙집권 체제 확립 전까지 블레셋에 굴복해
약탈과 정착 공동 목표 위해 뭉친 복합 민족
1. 들어가는 말
국제 질서는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 지역에서 강대국이 나오면 주변 국가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크게 부강했던 시절과 약했던 시절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부강했던 시절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웃 강대국들에 의해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형성되었던 것은 바로 다윗-솔로몬 시대였습니다. 이 영화로웠던 시대에 대한 자부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습니다.
다윗-솔로몬 시대의 특징은 국제 정세에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가 가장 취약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가나안 지역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가나안 지역 패권국가 중 하나로 등장한 이스라엘이 애굽과 메소포타미아가 빠진 빈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즉 북쪽으로는 멀리 유프라테스강 남단 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애굽강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창 15:18; 대하 9:26).
물론 모든 지역을 다 정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지역에 속해 있던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아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풍족한 삶을 누렸던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과 메소포타미아가 국제 질서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기에 이스라엘만 패권을 잡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최고 황금기를 누리기 전, 이스라엘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민족은 블레셋이었습니다.
가사(지금의 가자 지역)를 중심으로 5개의 연합 도시를 형성한 블레셋은 가나안에서 가장 좋은 땅인 ‘블레셋 평야’를 점령하여 살았고, 이들은 철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변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늘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큰 민족을 이루며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은 늘 위협의 대상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은 영토를 풍요로운 해안가 지역으로 넓히지 못하고 “산에 사는 민족”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척박한 유다 산지와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운명은 주변 국가와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한 나라가 강해지면 이웃 나라는 약해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한 국가가 약해지면 이웃 국가가 득세하게 됩니다.
애굽이 강해지면 상대적으로 메소포타미아는 약해지고, 또 애굽이 약해지면 메소포타미아가 강해집니다. 메소포타미아 내에서도 앗시리아 지역이 강해지면 바빌로니아 지역은 약해졌고 또 앗시리아 지역이 약해지면 바빌로니아 지역은 강해졌습니다.
가나안 지역도 마찬가지로 블레셋이 강할 때는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기로 무장한 블레셋은 가나안에서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며 살았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켜 많은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사분오열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 국가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블레셋의 위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이 어떻게 이스라엘 왕국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는 것은 성경 이해에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2. 블레셋의 기원
1) 이름의 기원
블레셋의 기원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역사적 증거 부족으로 추론에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방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블레셋(Philistines)’은 이름 뜻 그대로 가나안 토착민들은 아닙니다. 블레셋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0장 14절과 역대상 1장 12절로, 함의 손자이며 미쯔라임의 아들인 ‘가슬루힘’에서 나온 족속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47장 4절과 아모스 9장 7절은 이들을 갑돌(Caphtor, 크레테 섬)에서 온 족속이라 부르고 있는데, 갑돌에서 온 이 무리들이 가사 지역(Gaza, 오늘날 가자 지역) 각 촌에 거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거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신 2:23).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 곳 가사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그렛 사람(Cherethites, 오늘날의 크레테 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습 2:5; 삼상 30:14).
이와 같은 성경의 기록을 볼 때 블레셋이 가사 지역에 거주하는 족속들을 지칭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블레셋이라 불리며 살았던 족속들이 두 그룹이 아니었나 판단됩니다.
즉 초기 거주민들은 미쯔라임(즉 애굽)의 기슬루힘 후예들로 보는 점에서, 갑돌로 갔던 사람들은 애굽에 기원을 둔 이주민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사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청동기 시대 말기 인도-유럽어를 쓰는 북방 철기 민족들에게 쫓겨 에게해에서 지중해 동쪽으로 피난해 온 사람들인 것 같으며, 이들은 함의 후손이 아니라 야벳 족속의 후예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초기 거주자와 후기 거주자를 구별할 수 있는 어떤 뚜렷한 역사적 자료들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두 부류의 민족들이 서로 혼합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가사라는 지역의 특성을 놓고 볼 때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가사는 애굽 왕국 초기부터 애굽에서 필요로 하는 수입품목 특히 레바논의 목재를 운반해오기 위한 식민지로 건설된 곳으로, 일찍부터 이곳에 기슬루힘 후예들이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방 민족의 침입을 피하여 남하하였던 야벳 후손들은 갑돌을 거쳐 거주하기 좋은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들은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을 하기도 하고 좋은 곳이 나타나면 정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배에 가족들을 태우고 다녔는데, 이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착’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소수 인원이 여러 척의 배로 나누어 이동하는 이들은 기존 거주민들과 전쟁을 벌이기보다, 안전을 위하여 성벽을 쌓은 작은 도시를 형성하며 기존의 거주민들과 혼합하여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풍부한 물과 넓은 기름진 땅으로 거주하기에 매우 좋은 블레셋 평야 지역의 자연환경은 이런 화합과 양보의 자세를 더욱 부추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이들이 믿던 종교도 여러 종교의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진 블레셋 지역에 강력한 도시 국가들이 형성된 것은 애굽과 해양 민족들 간 전쟁이 오랜 기간 벌어진 결과입니다.
특히 B.C. 1177년 이들 사이 사활을 건 전쟁에서 승자 없이 전쟁은 끝났으며, 양쪽은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애굽은 이 전쟁 후 심각한 국력의 손실을 입어 오랫동안 가나안 지역에 진출할 수 없었고, 해양 민족들도 많은 피해를 입어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들 중 패잔병들 일부가 가사 지역에 문화적으로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기존 거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정착하여 강력한 도시국가들을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요즘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2) 역사적 기원
이처럼 블레셋의 기원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지만, 블레셋의 중심축을 이루는 민족은 해양 민족들(Sea Peoples)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청동기 시대 말기 철기를 가지고 남하하는 북방 민족들에 의해 그리스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면서, 이들은 정착하기 위한 땅을 찾아 지중해 지역 특히 동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합니다. 이들에게 특히 표적이 되었던 것은 부유한 애굽으로, 오랜 기간 해양 민족들은 소규모로 배를 타고 이동하며 애굽을 약탈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해양 민족들이 개별적으로 애굽의 비옥한 삼각지 지역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점점 이들의 숫자가 불어나고 사회 혼란의 원인이 되자, 애굽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들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와서 약탈을 한 후 도망치는 이들을 소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전쟁은 자연 장기전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레바논 지역을 놓고 힛타이트족과 자주 벌인 전쟁으로 국력이 쇠한 애굽 신왕국(B.C. 1570-1069) 19대 마지막 왕인 메렌프타(Merenptah, B.C. 1279-1212)는 왕국의 명운을 걸고 해양 민족들과 대결하여 승리합니다. 이들의 특기인 기습 공격에 대비해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 반격을 가하여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힙니다.
그러나 20년 뒤 여러 해양 민족이 다시 연합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나타나자, 애굽 신왕국 마지막 왕이자 20대 왕조의 유일한 왕인 람세스 3세(B.C. 1186-1154)는 국운을 걸고 전쟁을 벌이지만 이 전쟁으로 인하여 신왕국이 멸망하는 비운을 맛보게 됩니다.
에게해 지역 5개 민족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해상과 육로를 통하여 애굽으로 진격한 해상 민족들은 가는 곳마다 초토화시켰으며 람세스 3세는 가사 남쪽 지역에서 이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가까스로 애굽으로의 전진을 막기는 하였지만 애굽이 받은 피해는 막심하였으며, 이 전쟁의 결과로 애굽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던 애굽 신왕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애굽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국내적으로는 패전 후유증으로 질병, 기근, 각종 범죄 등이 횡행하였으며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한 상태에서 신왕국 패권 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고, 가나안 지역에 대한 애굽의 지배는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람세스 3세와 전쟁을 벌였던 해양 민족들도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수받은 철기로 무장한 이들은 엄청난 숫자의 애굽 군대와 전쟁을 벌여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숫자의 군대를 가진 이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어 다시는 재기를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때 해양 민족 중 일부 패잔병들이 블레셋 평야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이 바로 성경의 사사 시대에 등장하는 블레셋입니다. 이들은 민족적 동질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탈과 정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서로 뭉친 복합 민족입니다.
따라서 블레셋인들은 여러 도시 국가들을 형성하여 블레셋 평야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정착하는 과정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많은 문화를 공유하는 갑돌 출신의 기존 블레셋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세운 주요 도시로는 해안 도시인 아스돗, 아스켈론, 가사, 그리고 내륙 도시인 에크론, 갓 등입니다(수 13:3; 삼상 7-14장). 이들이 해안가에 있는 비옥한 토양을 차지하며 정착하자 기존의 이스라엘과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삿 3:31, 13-16장; 삼상 4-6장). 강력한 적을 맞이한 이스라엘의 국경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이 블레셋 평야에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을 볼 때 사사 시대 후반기와 이스라엘 왕국 초기(B.C. 1150-1000)에 블레셋은 가나안에서 최강자로 군림하였습니다. 삼갈이나 삼손 같은 사사 이야기 배경도 블레셋이고 사울이 통치한 40년 동안의 주적도 블레셋이었습니다.
블레셋 평야, 가나안에서 물 가장 풍부한 지역
애굽, 외부 세계 차단시키고 국내 정치 집중해
앗수르·바벨론 땅 힘의 공백, 페르시아 기지개
3) 블레셋 평야의 특성
블레셋이 블레셋 평야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처럼 농사에 사용할 수 있는 큰 강이 없는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의 비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지중해성 기후로 인하여 겨울철에 비가 내리는 가나안 땅에서 농사 짓기에 충분히 비가 내리는 곳은 ‘족장길’이라고도 불리는 중앙산지 지역 능선의 서쪽입니다.
푄 현상으로 비를 머금은 구름은 편서풍을 타고 중앙산지를 넘기 전 비를 다 뿌리며, 중앙산지를 넘으면 편서풍은 고온건조한 바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이 고온건조한 바람이 부는 중앙산지 동쪽 편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수목이 자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유대 광야라는 지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중앙산지 서쪽편은 비가 내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됩니다. 특히 블레셋 평야에 내리는 비는 물론 중앙산지 서편 쪽에 내리는 비가 해안 평야 쪽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이곳은 수량이 풍부하고 지하로 스며 들어간 물이 솟구쳐 나오는 샘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로 이 지역은 이스라엘 전체 지역에서 가장 물이 풍부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지역은 중앙산지 서편 쪽에서 빗물에 쓸려 내려온 충적토가 두껍게 쌓여 있기 때문에 매우 비옥합니다. 거기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열풍을 타고 날아온 누런 미세먼지가 이 충적토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더욱 비옥할 뿐 아니라 지반도 견고합니다.
블레셋 평야의 북쪽에 위치한 샤론 평야는 주로 모래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지반이 약하여 말이나 마차가 다니기에도 불편합니다.
나아가 이곳은 물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도시가 발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이름 모를 들풀이 우거진 넓은 초원이 되었고, 이 풀들을 이용하여 가축을 키우는 목초지 외로는 용도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평야는 충적토와 미세 먼지로 구성되어 있어 토질이 비옥할 뿐 아니라 단단하였기 때문에 도로가 구석구석 잘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또 중앙산지에서 지하로 흘러 들어간 물이 이곳에서 샘으로 분출하였기 때문에 식수 공급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런 관계로 이 지역은 일찍부터 도시가 발달하였고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인 해안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패권을 추구하였던 애굽 신왕국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해외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처럼 블레셋 평야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곳이고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이곳은 항상 강한 자가 차지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전 역사를 통틀어 이곳을 점령한 적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사사 시대에는 블레셋의 힘에 눌려 조공까지 바쳐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3. 블레셋 전성기 때 국제 정세
1) 애굽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사사 시대에 해당되는 애굽의 신왕국 시대(제18-20왕조; B.C. 1570-1069)는 애굽 역사에서 가장 부흥하였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애굽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였고 또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이방인들이 나일 삼각지에서 왕국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힉소스 왕국을 몰아낸 상 나일 출신의 아모스(Ahmose)는 테베를 수도로 정하고 상 나일과 하 나일의 통일이라는 애굽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신왕국의 특징은 내부 문제와 국경 수비에만 집중했던 이전 왕국과 달리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은 것입니다. 즉 신왕국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망을 가지고 가나안 지역은 물론 레바논이나 시리아, 소아시아 지역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애굽 역사에서 가장 넓은 땅을 점령하여 ‘애굽의 나폴레옹’이라고도 불리는 투트모스 3세(B.C. 1504-1450)는 팔레스타인은 물론 유프라테스강 넘어 메소포타미아까지 진출한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애굽 신왕국에서 18대 마지막 왕이었던 아멘호텝 4세(B.C.1352-1348)는 갑자기 왕국의 정책을 바꿉니다.
먼저 그는 종교 정책을 바꾸는데, 유일신 아텐(Aten)만이 참된 신이라고 주장하여 기존의 신앙 질서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제사장들이 신전에서 직업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믿어왔던 신들이 부정되자 왕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아멘호텝 4세는 신왕국의 확장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 대신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국방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로 인하여 군대는 훈련을 게을리하게 되었고 또 갑옷이나 무기 등 보급 물자가 끊기게 됨으로써 점점 전투력을 상실한 나약한 조직이 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주변 국가들은 반란을 자주 일으키게 되었고, 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도는 점점 약해져 마침내 18왕조는 끝을 보게 됩니다.
이어 정권을 잡게 된 19대 왕조는 다시 제국주의 정책을 시도해 보지만, 이때는 힛타이트족의 발흥으로 애굽의 활동 영역이 급속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투트모스 3세와 더불어 애굽의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람세스 2세(Rameses; B.C. 1279-1212)는 몇 차례 힛타이트족과 전쟁을 치르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호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더 이상 북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람세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메렌프타(Merenptah; B.C. 1212-1202)는 힛타이트족에 이어 새로운 국제적 변수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해양 민족들입니다.
인도-유럽어를 쓰는 북방 민족들의 남하로 거주할 곳을 잃게 된 이들은 지중해 동쪽 중에서도 식량이 풍부한 애굽을 자주 침범하여 약탈하였는데, 메렌프타는 기습 공격하는 이들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해양 민족들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20년 뒤 이번에는 많은 부족들이 연합하여 다시 공격을 감행합니다.
제20왕조를 연 람세스 3세(Rameses; B.C. 1186-1154)는 신왕국 마지막 전사로 해양 민족들과 애굽의 흥망을 걸고 끔찍한 살육전을 펼치게 됩니다. 애굽은 B.C. 1177년 해양 민족들과의 전투에서 회복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입고, 이후부터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패권을 잡으려는 제국주의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애굽은 외부 세계로 나가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오직 국내 정치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왕권이 약해진 관계로 반란이 끝도 없이 일어났으며, 특히 상 나일과 하 나일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면서 왕권은 약화되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흉년이 들어 전국 각지에 기근이 유행하였고, 전염병도 떠돌아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왕국이 무너지면서 애굽은 해외 진출의 교두보인 가나안 지역으로부터 철수해야 했고, 이 공백을 해양 민족들의 잔당인 블레셋이 채우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인 철기로 무장한 이들은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쉽게 가나안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주변국들에게 많은 조공을 요구하며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애굽은 극심한 혼란을 겪는데, 상 나일과 하 나일로 분열돼 많은 반란과 분열을 겪으면서 종이 호랑이로 변하게 됩니다.
앗시리아 신왕국과 바빌로니아 신왕국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애굽은 잔인한 제국주의 정책을 펴는 메소포타미아에 대항하는 동맹의 수장 역할을 맡았지만, 제대로 수장 역할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애굽은 명맥만 이어가다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었고, 이어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하여 그리스 제국의 한 부분으로 흡수당하게 됩니다.
2)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는 애굽과 달리 수많은 정권 교체가 일어났습니다. 애굽은 주변이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부의 침략을 별로 받지 않는 환경 속에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비록 상 나일과 하 나일 사이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경쟁은 있었지만, 애굽이라는 동질성은 대체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는 주변이 개방돼 있어 늘 침략을 하지 않으면 침략을 당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었고, 넓은 지역에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다 보니 정권교체는 늘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애굽의 역사가 비교적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다면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블레셋이 가나안 지역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을 때(B.C. 1150-1000), 메소포타미아는 암흑기(B.C. 1200-900)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국들의 충돌’ 때문이었는데, 기원전 13세기 끝 무렵부터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유럽의 남서부를 향하여 밀물처럼 들어왔고, 이는 유럽 남부에 살던 해양 민족들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들의 침입으로부터 탈출구를 찾던 해양 민족들은 먼저 지중해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애굽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B.C. 1177년 애굽과 해양 민족들간 대충돌로 양쪽 다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애굽은 더 이상 북쪽으로 진출할 수 없게 되어 레바논이나 가나안 지역 식민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많은 전투력을 상실한 해양 민족들은 더 이상 인도-유럽어족들의 남침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북방 민족들의 침입으로 소아시아와 북시리아에 자리잡고 있었던 힛타이트족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그 결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안전한 무역조차 힘들어진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도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함무라비에 의하여 거대한 제국이 된 바빌로니아 고왕국(B.C. 2004-1595)은 힛타이트족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는데, 고왕국을 이어받은 것은 카사이트 왕국(B.C. 1570-1157)입니다.
인도-유럽어를 쓰는 힛타이트족은 일회성 공격으로 고왕국을 무너뜨리지만 뿌리가 깊지 못했던 자신도 즉시 역사의 주무대에서 사라집니다.
힛타이트족들을 대신한 것은 카사이트족으로,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고왕국 문명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던 자들로 고왕국의 중심 무대였던 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바빌로니아’라는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시킨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들로 인하여 비로소 상 메소포타미아는 ‘앗시리아’로, 하 메소포타미아는 ‘바빌로니아’로 개념이 정립되는 결과가 이루어집니다.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북방 민족들의 남하는 카사이트 왕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쪽에서는 엘람족이 압박을 가하였고 북쪽에서는 앗시리아와 대치하게 된 카사이트 왕국은 점점 세력을 잃어갔으며, 마침내 B.C. 1157년 엘람족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됩니다.
바벨론은 점령당했고 마르둑 신상은 엘람으로 실려가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길었던 400여 년의 단일 왕국 통치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바빌로니아는 B.C. 620년 신왕국으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앗시리아에게 종속과 독립을 반복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냅니다.
반면 앗시리아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있는 앗수르라는 도시에서 시작한 왕국으로, 이곳은 주로 목축업이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왕국의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진출하기 좋은 앗수르의 지정학적 위치는 신왕국 때처럼 힘이 강할 때는 도움이 되었지만, 고왕국 때처럼 힘이 약할 때는 주변 국가들의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빌로니아 고왕국이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면, 앗수르 고왕국(B.C. 2000-1400)은 바빌로니아의 발전된 문명을 흡수하고 또 자신의 영토를 보전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미탄니 왕국이 상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주도하면서 일시적으로 주춤하였던 앗수르는 곧 상 메소포타미아를 통합하면서 중왕국(B.C. 1400-900)을 이루게 됩니다. 이들은 포로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포로의 눈알을 빼는 잔인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신왕국(B.C. 911-609) 때도 그대로 답습되어 북이스라엘에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중왕국은 바빌로니아와도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마르둑의 신전을 약탈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이미 바빌로니아의 화려한 문명에 녹아 있던 앗수르인들은 마르둑을 메소포타미아를 대표하는 신으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마르둑 신전을 약탈하는 왕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민심이 이반한 앗수르는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거기에 앗수르 중왕국의 멸망을 재촉한 것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북방 민족들의 침입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무역로는 차단되었고 이에 따라 무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앗수르인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렇게 암흑기를 맞이한 앗수르는 마침 주변에 강력한 국가들이 없어 파멸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아람족과 바빌로니아를 밀어내고 신왕국(B.C. 911-609)을 세울 때까지 생명만 유지하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와 바빌로니아의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아람족들이 시리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였고, 자주 유프라데스강을 건너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를 압박하곤 하였습니다.
또 신힛타이트족이 출현하여 시리아 북쪽을 차지하였고, 이에 밀린 아람족은 시리아 중부와 남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였습니다. B.C. 1000-700년에 이르는 시기 성경에 수많은 예가 나와 있는 것처럼, 아람족은 이스라엘과 패권 경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가 약해진 틈을 타 두로나 시돈 같은 페니키아 도시들이 무역을 통하여 크게 부흥을 하였습니다. 이전까지 지중해를 주름잡던 미케네 문명은 도리아인들의 남침으로 쇠퇴하였고, 뒤이어 페니키아 도시들이 자주색 염료를 사용한 옷, 목재, 포도주, 올리브 등 최고 경쟁력을 지닌 상품들을 가지고 지중해 무역을 휩쓸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목할 것은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가 약해진 틈을 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북쪽에서 남하한 이란인들이 이란 고원 지역에 들어와 자그러스 산맥 너머 메데와 바사를 건설하였으나, 아직 역사의 전면에 나설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힘을 키우면서 메소포타미아를 대신할 왕국으로 준비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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